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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무용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악도

by 소리향 202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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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무용,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악도 이번에는 삼국시대 중에서 고구려의 무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삼국시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삼국 시대 중에서 고구려는 가장 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백제와 신라에 비해 대륙과 매우 인접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았다. 이러한 이유로 가장 일찍 대륙의 다양한 문화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자율성을 가진 왕권 국가로 발전시켰던 나라로 보고 있다. 특히 불교를 받아들여 불교 예술이 번성하였고, 중국 북방과 남북조 문화 등 외래의 문화를 많이 수입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에는 여러 문화들의 영향을 종합한 듯한 독특한 예술 문화가 생기게 되었으며 고구려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옛 동굴의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수렵총 등에서 발견된 벽화나 그림들에서 보면 고구려의 무희들은 묘사된 선에서 나타나듯이 매우 생동감 있는 동작과 박력을 느끼는 동작들과 색감 또한 뚜렷하다. 말을 달리는 무사의 모습에서는 실제로 만주 벌판을 달리고 있는 듯한 고구려인의 용맹하고 웅건한 패기가 느껴진다. 독특한 고구려의 악무는 일찍부터 중국에 수입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악무는 수나라의 ‘칠부기’와 ‘구부기’ 그리고 당태종 때의 ‘십 부기’에 함께 하며 ‘고려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이는 중국의 역사책인 <남사 이백전 고구려 조>에 의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고구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겨서 나라 안의 모든 부락 남녀들이 밤마다 여럿이 모여서 노래 부르고 논다. 그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또 술을 빚어 두고 마신다. 꿇어앉거나 절을 할 때는 한쪽 다리를 뻗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아나는 것과 같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인다.’ <고구려 전>에 의하면 ‘음악은 오현금과 쟁, 피리, 퉁소, 북 따위가 있고, 갈대 피리를 불어서 곡조를 마친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패수 위에 모여서 논다. 이때 왕은 조그만 수레를 타고 우의를 벌려서 세우고서는 이것을 구경한다. 이 일이 끝나고 왕이 옷 한 가지를 물속에 던지면 사람들이 좌우 두 패로 갈려서 물속에서 돌을 던지고 시끄럽게 싸우다가 한참 만에 그친다.’라고 전해진다. 이런 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고구려의 사람들이 얼마나 풍류를 즐기며 행복하고 낙천적인 생활을 즐겼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정착시켰다. 고구려악과 무용의 우월성에 대하여 이혜구 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구려악은 당시 중국 주대의 ’ 오현‘과 '필률'같은 서역의 악기를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백제의 음악이나 신라의 음악보다 우월하여 수나라의 '구부기'에 들 수 있었고 또 서역의 악기와 가면무를 받아들여서 일본에서 백제악 또는 신라악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고려악이란 명칭으로 전래된 것이다.’ 그렇다면 <수서 음악지>에 수록된 ‘구부기’를 간략히 소개해 본다. 구부기는 고려기, 국기, 청상기, 천축기, 안국기, 구자기, 문강기, 강국기, 소륵기라고 하는 아홉 가지의 음악과 무용을 말한다. 여기서 ‘고려기’는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을 말하며 ‘서량기’는 서역 지방의 음악과 무용을, ‘청상기’는 중국의 속악을 일컫고 있고 ‘천축기’는 인도의 음악과 무용을, ‘구자기’는 Couchi지방의 음악과 무용을 말한다. ‘문강기’는 진나라 시대의 ‘가면기’를 말하며 ‘강국기’는 사마르칸트 지방의 음악과 무용을 ‘소륵기’는 카사가(Kashgar) 지방의 음악과 무용을 일컫는다. 이 중에서 천축기, 안국기, 구자기, 강국기, 소륵기는 서역의 음악이며 청상기, 문강기는 중국의 음악과 무용이고 국기는 구자악과 중국 악이 혼합된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악이라고 하는 것은 음악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며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이 하나로 이루어진 종합예술의 총칭을 말하며 가무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고구려의 무용의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 중 하나인 무용총의 벽화에서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의 벽화 중에는 무악도가 있는 데 다섯 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모습이 연출되어 있다. 여기서 <삼국사기> 원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붉은 비단 모자에 새깃으로 장식하고 노란 큰 소매에 붉은 비단을 띠고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끈을 맨다. 춤추는 자는 네 사람인데 머리를 뒤로 뭉치고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금 사슬로 장식한다. 두 사람은 노란 치마저고리에 노란 바지를 입고 두 사람은 붉고 노란 저고리에 속바지를 착용하는데 소매는 몹시 길고 오피화를 신으며 짝을 지어 나란히 춤을 추더라’ 고 하였다. 고구려의 춤은 이 무용도를 통하여 그 특징을 추정할 수 있다. 쌍쌍이 늘어서서 추는 춤의 형태와 긴 소매의 옷을 입은 모습은 이후에 ‘한삼’으로의 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무용은 이미 예술적인 형태의 모습으로 갖추어져 대중이나 행사에서 행해져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에 성행되고 확립된 우리나라의 춤, 그리고 의상은 과거 역사와 전혀 다르게 발전되어 온 것 같지 않다. 벽화 속에서 보여지는 의상은 예부터 우리 민족이 좋아하던 분위기와 색감이 엿보이며 당당한 아름다움이 깃들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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