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무용과 호선무와 광수무에 대하여~
고구려의 춤에 대하여 연구하고 찾아보다 보니 새로운 것만 찾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옛것을 연구하고 조사하다 보면 자연스레 작금의 예술이 비교되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으니 역사 속에서 춤을 찾고 연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것 같다. 고구려 당시의 무용은 1949년 발굴된 안악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분에는 후실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후실 벽화에는 여러 가지 악기와 그 악기들을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거문고와 퉁소 악기와 완함이라는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이색적이다. 이 사람은 자리에 다리를 X자 모양으로 꼬고 앉아서 손뼉을 치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이색적이고 특이하다. 이 무인을 가면무인이라고도 하며 발굴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인물은 점무늬가 있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있으며 옆으로 숙이고 있는 얼굴은 유달리 콧대가 높아 보인다. 다리는 X자의 모양으로 꼬고 있으며 두 손은 손바닥을 마주대고 마치 손뼉을 치는 것과 같다. 이 인물은 세 명의 악기 연주자들의 관현악 합주에 맞추어서 춤을 추고 있는데 손뼉을 치면서 춤추는 모습이 고구려인이라고 느껴지기보다는 외국에서 온 사람이 추는 무용인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통구 12호 고분을 통하여 볼 수 있듯이 고구려 무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분의 남쪽 벽에는 거문고같이 생긴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두 명의 여인이 양쪽으로 나란히 서서 춤을 추고 있다. 또 고산동 10호 고분에도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 것을 살펴보면 두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자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의 특징을 살펴보면 세 명의 사람은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으며 두 팔을 벌려서 춤을 추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고분에 그려진 그림들만 살펴보아도 고구려인들의 동적이고도 발랄한 기질을 충분히 미루어 상상해 볼 수가 있다. 고구려 무용에 대한 문헌 기록도 남아 있다. 송대의 사마광의 저서인 <수서 음악지>에 있는 한자를 해석한 것을 살펴보자. ‘지서가’라는 노래와 ‘지서 무’는 춤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춤에 대한 내용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대의 ‘십 부기’ 중에 ‘고려기’에는 ‘호선무’와 ‘광수무’라는 무용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호선무’라는 것은 ‘춤추는 사람이 커다란 공 위에 올라서서 바람처럼 빙빙 굴리며 추는 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호선무’에 대하여는 송대의 구양수라는 사람이 쓴 ‘신당서’에서 이렇게 읊은 구절이 나온다. 이것을 당대의 시인 백낙천이라는 사람이 읊은 내용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선녀 호선녀 마음을 풀고 손은 북을 친다. 현악과 북이 하나로 소리가 맞을 때 두 손을 들더라. 구름이 떠도는 모양으로 가랑잎이 나르듯 하며 좌우로 돌며 추나 피곤할 줄 모르고 천만번 돌면서 자기도 모르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호선 무는 예술적으로만 보이는 순수한 예술무용의 종류라기보다는 기예에 가깝고 곡예적인 요소를 많이 보여주는 식의 아크로바틱적인 무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유의 춤이라기보다는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춤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광수무’에 대해서도 짧게 살펴보고자 한다. 해동역사에 실린 성당 시대의 시인인 이백의 시에서는 ‘광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금빛 모자를 쓰고 흰 말을 타고 천천히 돌아 들어오고 긴 소래를 펄펄 날리니 동쪽 바다에서 날아오는 흰 새와 같더라.‘ 이처럼 허선무와 광수무에 대해 살펴본 것과 같이 고구려의 무용은 고대의 원시적이고 의식적인 무용에서는 많이 탈피하고 벗어난 듯 보인다. 고대의 춤은 무속행사에서 주로 많이 나타났고 의식을 행할 때 거행되던 식의 무용의 형태를 많이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 들어서는 무용이 제법 예술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구려는 당시 삼국 중에서도 가장 문화예술이 발달하였다고 보이므로 서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문화와 예술도 활발하게 교류되고 전해졌다. 그중 일본에서는 몇 가지의 악기와 무용도 전하여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궁중에서도 고구려의 악부가 설치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는 민속예술 서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인의 기상과 예술적인 기질은 벽화의 그림을 통해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잠시 살펴볼 수 있었다. 고구려의 음악과 예술 그리고 무용은 수나라의 구부기의 하나에 포함될 정도로 우수함을 인정받았고 일본에까지도 그 이름과 명성을 알릴 수 있었다. 그 이유 중에는 서역의 발달된 악기를 일찍부터 받아들여서 그것을 도입하여 가무의 편성과 규모를 크게 할 수 있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구려인은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민족이었다고 보인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들은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백이나 기상이 남달랐기에 자유롭고도 발랄한 예술 문화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옛날 우리가 누리는 것과 같은 문화예술을 이미 이룩하고 있었다는 점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일찍부터 우수하게 자리 잡힌 우리의 한국무용, 한국의 예술의 역사야말로 이 세대의 예술문화를 더욱 빛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