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민간 무용과 무고, 무애, 동동에 대하여 고려시대에는 궁중정재에 있어서 훌륭한 예술 문화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도 흥겨운 무용을 일으켜서 민간 무용으로도 일반인들의 전통이 남아있다. 민간 무용의 발달도 가무백희의 산실이 되었던 행사 팔관회로 인하여 자리 잡게 되었다. 민간 무용의 연희 내용은 북방의 글안, 여진, 몽고 등에서 행해지던 호악과 호희까지 함께 적용이 되어서 그 내용이 다양하였으며 음력 섣달 그믐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산신을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이었던 나례, 그리고 서민들의 농사에서 즐기던 농악, 가면무와 같은 산대잡극이 커다란 몫을 하였고 나비춤, 법고춤, 목어와 같은 불교의 의식이자 춤이었던 작법과 함께 전국의 사찰에서 불교 의식의 하나로 성대하고도 호화스럽게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도 고유의 신앙으로 전해지던 국조 단군을 섬기는 일도 유교나 불교에 못지않게 중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종교의식에서 행해지던 춤도 계속하여 성행되었으며, 무속신앙의 영향으로 무당들의 굿에까지 가무가 이용되었던 것은 언급 하나마나 자명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 사용되던 악기들을 살펴보면 삼현육각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삼현육각의 악기 편성은 북 1, 장구 1, 피리 2, 대금 1, 해금 1이었으며 이러한 악기를 통하여 반주로 사용하였다. 고려 시대에 와서는 30여 종의 악기가 구비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악기들이 통용되었으므로 이러한 악기들이 종합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웅장하고도 볼만한 관현악 합주의 형태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와서 음악과 무용이 문화 예술로서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형태 또한 어느 정도의 틀이 형성되었으며 궁중과 민간에서도 감상하기 위한 공연 형태로써의 무용으로 공연되기 시작했다. 고려 시대의 향악정재는 당악정재와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향악정재는 격식을 갖추어서 진행되던 당악정재와는 달리 격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음악이 시작되면 나와서 절을 하고 다시 일어나서 춤을 추다가 우리말로 노래를 부르고 또다시 춤을 추는 형식으로 성행하였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당악정재에 비해 우리 고유의 가무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흥을 소중히 하고 있는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향악정재로는 무고와 무애, 동동 그리고 처용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처용무에 대하여는 앞서서도 잠시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고와 무애, 동동에 대하여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무고’에 대하 살펴보면, ‘무고’는 시중 이 곤이 영해에 유배되어 갔을 때 바닷가에서 물에 뜬 뗏목을 건져 와서 그것으로 무고를 만들었다고 하며 그 소리가 굉장하였다고 한다. 무고에 대해 기록된 것을 보면 ‘춤은 즐겁게 돌아가는 것으로 하늘거리는 한 쌍의 나비가 꽃을 감도는 것 같고 용감스러운 두 용이 구슬을 다투는 것과 같다’고 전해오며 가장 기묘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무고는 북을 가운데 놓고 두 사람이 유연한 형태와 용감한 형태로써 다양한 춤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이 구슬을 다투는 듯 용감스럽다는 표현을 한 것은 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표현된 모습에서 비유된 것으로 보인다. 무고에서 무원의 수를 보면 처음에는 2 고무로 되었다가 다시 4 고무, 8 고무 등으로 그 수에 있어서도 다소 가감이 있는 것으로 고려사 악지 혹은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다. 이 춤이 바닷가에서 얻은 뗏목으로 북을 만들어 두들겨 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므로 최초에는 서민들에 의해 민가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에 이 춤이 관심을 받으면서 궁중정재가 되었으며 그 형태가 화려해졌으리라는 것 또한 추측할 수 있다. 무고는 지금도 궁중무용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오랜 전통을 가진 춤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초에 발생했던 무고의 순수한 민속적인 춤의 형태는 세월 속에서 변해왔으며 지금은 그 형태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애’는 앞장의 신라 시대에서도 소개한 바가 있듯이 신라의 원효 대사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춤으로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그 가사는 불가의 말이 많이 쓰여 있고 방언이 많이 섞여 있어서 그것을 짜 넣기가 어렵다’고 전할 뿐 그 춤은 전해지지 않는다. ‘동동’에 대하여는 그 가사에 송축하는 말이 들어있는데 대체로 신선의 말을 본떠서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춤은 특별히 전하는 속설은 없으나 고려사 악지에는 속악정재라고 하고 악학궤범에는 향악정재라고 전해지게 되면서 ‘아박무’라고도 기록이 되어 있다. 원래는 민간에서 전래되던 춤이었으나 후에 궁중정재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정재가 되기 전에는 어떠한 형태로 실연되어 왔으며 원초적인 춤의 형태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기록된 것이 없으니 추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동은 ‘아박은 양 손에 쥐고 치면서 추는 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아박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춘 춤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춤을 추던 최초에는 상어의 뼈나 그와 비슷한 기구를 가지고 그것을 들고 치면서 추는 춤이었다. 이후에는 춤을 추는 무희가 두 손에 타악기를 들고 손수 치면서 추는 춤의 형태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고려시대의 음악과 동반된 춤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고려시대의 춤은 신라의 팔관회에서 연행되었던 가무백희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조선시대의 무악에도 모태가 되었다. 또한 민간에서 발생한 민속무용 중의 일부가 궁중의 향악정재로 되기도 하였다. 고려의 무용사는 민속무용과 궁중무용의 커다란 변화를 낳았으며 제대로 된 형식의 예술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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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민간무용과 무고, 무애,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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