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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무용, 서울 중심으로 한 답교놀이

by 소리향 202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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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민속무용을 크게 분류하여 보면, 가면무용, 기방 무용, 무속 무용, 사찰 무용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속 무용과 사찰 무용은 오랜 옛날부터 종교적인 행사를 통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어느 나라나 대부분의 고대사회의 예술은 이러한 종교의식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면무용이나 기방 무용은 일반적인 대중들 사이에서 즐기던 무용 중에서 그 예술성이나 풍자성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면서 현재까지 발전되어 왔다. 기방 무용은 이미 보여주기 위한 무용으로 자리 잡은 것이므로 대중들의 눈에도 아름다우며 무대 무용으로써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기방 무용은 무속 무용과 사찰 무용 중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빼고 그 기교만을 살려서 예술적인 면만 담은 춤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시도를 동한 창작을 하면서 발전되어왔기에 현재까지 전해오는 춤들의 예술적 가치와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민속무용 중 가면무용은 가면극에서 보이는 춤들이기에 그 춤이 매우 자연스럽고 익살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가면무는 농경 위주로 지내던 농경 사회에서 비롯된 농악 무용 또는 향토 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농악 무용이라 하면 농가의 일상에서 만들어진 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이 많았기에 가면무용이라고 하는 구분이 생긴 것 같다. 농경사회에서의 농악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함께 모아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농악은 단순한 작업적인 놀이뿐만이 아닌 예술로 발전되었다. 농악의 리듬과 춤 놀림은 반복적이고 단조롭고 단순해 보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응이 넘치게 한다.. 대중적으로 즐길만한 오락활동이 많지 않았던 농경사회에서 농악은 모두를 즐겁고 흥겹게 하며 신명 나게 하는 예술이었다. 농악 소리를 들으면 함께 모인 공동체 마을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든 시름을 잊고 한바탕 뛰고 노는 것이었다. 이 놀이에서 춤은 빠질 수 없었다. 꽹과리와 징, 장구, 북, 소고 등으로 구성된 타악의 장단과 태평소와 나발 같은 큰 소리 나는 관악기들이 어울려 함께 하면 농사를 지으면 힘들었던 시름이 물리쳐졌으며 다시 힘을 내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농악의 유래를 오래된 문헌에서 찾아보면, 씨를 뿌리는 시기인 5월과 곡식과 열매를 거두는 시기인 10월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가장 많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시기였으며 춤으로써 그 흥을 더하였다. 이러한 농악 행사는 지역마다 각각의 특색이 있는 문화를 낳았다. 경기도에서는 답교놀이, 양주 소놀이굿, 거북놀이, 호미씻이 등의 놀이가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세시풍속인 민중적인 놀이에서 추어졌던 자연발생적인 것이기에 흥이 절로 나는 춤은 필수로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춤들은 정형화되어 전래되어 오는 춤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전해 내려 오는 춤들 또한 그 춤사위나 형태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으며 흥이 나면 즉흥적으로 춤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답교 놀이의 유래를 살펴보자. 당시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고 지나가면 그 해 1년 동안은 다릿병 즉 각질이 없이 잘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열두 다리를 밟고 지나가면 열 두 달의 액을 면한다고 생각하여 이 행사가 있는 밤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다리를 밟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다리밟기 또는 답교놀이라고 하였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대보름 저녁에 시작하여 밤새도록 놀았다. 그러나 한 때는 신분에 따라 행사하는 날을 구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양반층은 14일 밤에, 서민층은 15일 밤에, 그리고 부녀자들은 16일 밤에 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부녀자들의 문밖출입을 금지하였던 조선 중엽 이후 부녀자들의 답교놀이가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서는 북이나 퉁소 등의 악기를 불며 그 흥을 돋우었으며, 부녀자들은 음식물을 가지고 나와 냇물에 던지면서 한해의 복을 빌기도 하였다. 남자들은 농악을 앞세우고 무동을 서기도 하며, 저고리의 동정을 뜯어서 그것으로 엽전을 싸서 다리 한 구석에 놓아두거나 다리 아래로 던져버리던가 하는 행위도 하였다. 이것은 답교놀이가 다릿병을 피하거나 일 년 동안의 무병장수를 위한 서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놀이가 단순히 다리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흥겨운 풍악을 울리고 노래와 춤을 곁들임으로써 훌륭한 민속예술의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위대한 문화로 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추어진 춤의 형태들은 오늘날에 전해오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옛 문헌으로 이 놀이를 찾아보면 고려시대에 시작되어서 조선왕조 태종 이후에 크게 성행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답교놀이는 특히 서울지방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의 청계천 입구에 있는 광교와 수포교를 비롯하여 마포, 아현, 노량진과 장안리, 뚝섬, 몽촌, 송파, 돌다리 등지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답교놀이의 특징은 보통의 농악무가 서민층에서만 행해지는 것에 반하여 이 놀이는 양반층도 함께 참여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답교놀이를 하는 풍습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도 행하여졌지만 현재까지 민속놀이화 되어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답교놀이뿐이라는 점이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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