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가장 가깝게 자리 잡았던 백제의 음악과 무용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백제에 대한 기록은 중국 수서 동이전에서 백제기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 백제의 음악과 무용은 고구려의 악무와 같이 당시의 수나라 ‘구부기’에도 들지 못하였으며 일본에 가깝게 접하고 있었으나 일본에 대해서도 우리의 삼국악을 대표하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는 백제의 음악과 예술이 융성하지 못하였거나 우수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당시의 유행하였던 서역계의 음악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의 예술문화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는 반대로 중국 남조 악인 청악계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서역 악의 영향력은 아주 대단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오늘날에도 서양의 문화가 그 유행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백제의 음악과 무용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백제의 악무에 대하여 그나마 확실하게 부각되며 기록된 것은 일본 악서인 ‘악가록’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 사람이 서기 554년에 ‘백제 악’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기 612년인 백제 무왕 13년에 백제의 사람인 ‘미마지’에 의해서 ‘기악무’라는 춤을 일본에 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인 미마지가 귀화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에서 배워 기악무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불러서 안치하고 소년들을 모아 기악무를 익히게 하였다. 이에 진야의 수제자인 신한과 제문이라는 두 사람이 이것을 익혀서 그 춤을 전하여 받았다.’고 한다. 당시의 백제인인 미마지가 가르쳤다는 이 ‘기악무’라는 것은 현재까지 전해 지거나 남아있지는 않다. 그로부터 600년 후에 박근진의 <교훈초>에 이 춤이 가면무라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서는 기악면만 그대로 230여 종이 전래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고 놀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악’이라는 말은 불교 경전에서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때문에 이 기악무는 당시에 절에서 포교의 목적으로 연행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아닌 일본의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주로 가르쳤다고 한다. 기악의 내용은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선을 권하고 악은 징계한다는 뜻의 ‘권선징악’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일본 사기’에서 전하고 있다. 또한 ‘기악무’는 우리나라의 민속예술인 가면무의 기원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비교 내용을 전하고 있다. 특히 산대 도감 놀이와 같은 가면무나 봉산 탈춤과 같은 가면무의 모체가 되고 있다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기악무가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내용인데 반하여 우리나라에서 연희되고 전해오는 가면 무극은 대부분이 파계승에 대한 모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속단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우리나라의 가면무는 파계승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양반에 대한 희화화를 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당시의 양반들과 상류계층들과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 사항을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이유로 볼 때 그 내용의 의미가 기악무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일본의 기악무가 우리나라 가면 무극의 모체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는 속단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타당성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지나오는 동안 내용이나 주제가 그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게 되어있으므로 이 또한 옳은 주장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모든 문화예술에 있어서도 일본과 가장 왕래가 빈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라면 일본 무용사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옛 춤의 면모를 찾을 수가 있음은 당연할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그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백제는 옛날 마한 땅의 위치에 세워졌다. 때문에 삼한시대의 옛 관습이었던 하종 시기와 추수시기에 행하던 민속을 그대로 전한다. 5월의 씨 뿌리기가 끝났을 무렵과 추수가 끝났을 시기인 10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며칠 몇 날 동안을 밤낮도 없이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하는 문헌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미루어 본다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세시 풍속 중의 하나인 은산별신제와 도당굿과 같은 전통이 그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이 행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목탁과 비슷한 모양의 타악기를 들고 두드리며 다 함께 발을 맞추면서 흥겹게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춤을 추었다는 기록은 마한의 풍속이 농업과 같은 작업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농악이나 두레와 같이 한 해의 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단체무용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러한 단체 활동으로 이루어진 춤은 현재까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전해지고 있는 강강술래 춤과 같은 민속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강강술래의 윤무의 형태도 이때로부터 분화되고 발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성경린 선생님의 견해도 있는데 이는 꽤 설득력이 있다. 백제의 무용인의 의상에 대한 기록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 악지에 있는 통전의 기록에 따르면 ‘무자는 2인으로 붉은 빛깔의 큰 소매와 치마와 저고리에 장포 관을 쓰고 피리를 신는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의 춤과 음악은 고구려나 신라의 악무와 같이 많은 기록에 남겨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이유로 그 종목이 후세에 전해지지는 못하였지만 백제가 침류왕 원년에 남조의 동진으로부터 호승인 마라난타에 의해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 그때를 같이 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남조 악인 청악계의 영향을 받아 남조 문화를 수용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로 인해 미루어볼 때 백제의 예술 문화는 섬세하고 온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과 무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며 매우 이지적이고 고상한 많은 춤들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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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무용과 기악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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