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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발전된 무용, 검무와 처용무에 대하여

by 소리향 202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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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삼국시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국가로 군림하였고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이른 나라이다. 때문에 신라의 무용 또한 삼국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그 특징을 살펴볼 수가 있으며 가장 많은 음악과 무용의 형태가 남아있지만 그 기록은 매우 미약하게 남겨 있다. 신라 전기 시대에는 민속이 즐겁고 편안함을 노래했던 도솔가를 통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8월의 한가위 때는 여자들이 길쌈놀이를 통하여 내기를 하며 여흥으로 희소곡을 즐겁고 흥이 나게 불렀다고 전해지며 여기에는 당연히 춤이 함께 연희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가희 추측하고도 남는다. 당시의 춤으로는 사내 무, 사내 금 무, 하신 열무와 상신 열무, 소경무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무용들은 궁중에서 추어지던 춤이다. 주로 가야금 악기 반주에 맞추어서 연주되고 연희되었다. 또한 노래를 부르지 않고 가야금 연주와 무용으로만 연희되었던 춤들이 있는데 이는 한기무, 대금 무, 미 지무 등이다. 이 시대에는 금척, 무척, 가척이라고 하여 연주자와 무용가 그리고 노래를 하는 이들이 전문적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진흥왕 2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팔관회가 행해졌는데 이 팔관회를 통하여는 수많은 가무백희가 연희되었다. 이 행사에서 추어졌던 무용의 형태와 내용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그 역할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있었으며 중국의 산악 백희의 영향을 입은 것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13년 왕명을 받아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은 우륵에게서 학업 하였는데 우륵은 지금의 충주 지방에서 학습하였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고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 전문화된 당시의 예술을 알 수 있다. 또한 왕명에 의하여 악과 무를 가르치게 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수준이 어느 정도이었는지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예술도 수용하고 받아들였으며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불교 예술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라의 큰 행사들을 통하여 예술 문화가 발전한 것을 살펴볼 수가 있으며 연주를 하는 악기 또한 풍부하여져서 3현 3 죽의 반주에 맞춘 춤을 출 수 있었다. 가야금, 거문고, 비파, 대금, 중금, 소금과 박, 북, 해금, 장구, 피리 등의 여러 종류의 악기를 통해 관현악 반주와 어울려 추어진 춤들은 그 종류도 다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에 추어지고 연희되었던 춤들은 기록을 통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가 찾아볼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검무와 처용무는 현재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는 데 있어서 영향을 준 춤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검무와 처용무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검무’에 대해 살펴보자. 검무는 검기무라고도 하였다. 또한 황창랑 무 또는 황창 무라고도 하였으며 이 춤은 ‘동경잡기’와 ‘문헌 비고’에 의해 그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세의 황창이라는 소년은 백제의 왕을 시해하기 위해 검무를 추다가 백제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불쌍하게 여기고 슬퍼하던 신라의 사람들이 황창의 얼굴과 같은 가면을 만들어서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그 유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기에는 백제왕을 시해하려다가 죽었다는 황창이라는 소년의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 다른 유래가 전해진다. 이 황창이라는 소년이 품일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화랑이었던 품일의 아들은 열여섯 살의 어린 관창이었다. 그는 황산벌 싸움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백제의 계백장군에게 죽었다. 그리하여 이 어린 화랑의 충성심과 절개를 높이 사고 그 영혼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이러한 검무가 생겨났다는 전설이 또 다른 유래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검무는 전투적인 색깔이나 검술을 통한 묘기적인 춤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추는 일종의 가면무와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그런데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웃나라에서 보이는 검무는 그 특성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의 것은 기다란 칼을 휘두르는 기예적이고 곡예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반해 일본의 검무는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빠르게 칼을 휘두르며 놀리고 움직이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럼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검무는 어떨까? 현재에 전해지고 연희되는 검무는 그 형태와 동작이 다양하며 매우 아름답고도 절도 있게 행해지고 있기에 신라시대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신라 시대부터 유래한 것으로 추측하는 ‘처용무’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춤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중기 시대까지 궁중의 나례나 연례행사에서 추어졌던 춤이다. 처용무는 매우 남성적인 성격을 표출하는 춤으로 점점 더 세련되고 예술적인 형태로 보완되어 발전되어왔다. 고려 말에는 처용무가 2 인무로 추어졌으며 이후 기록에는 1 인무로 추어졌고 그 후에는 오방처용무라 하여 5명의 무용수가 춤을 추게 되었다. 1493년에 이룩된 악학궤범에는 <학연화대 처용무 합설>이라는 종합예술 형식의 성격을 띠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 역사적인 의의와 가치는 높이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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