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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무용 선유락과 그 밖의 무용

by 소리향 2021.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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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는 문화예술이 융성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를 갖춘 무용예술이 기록되어 있거나 남아 있다. 신라의 춤 중에서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가야지무’라는 춤이 있었는데 이 춤은 문무왕 8년에 지금의 충주인 국원에서 대아창용창이 잔치를 베풀어 왕을 대접하고 음악을 연주한 데서 유래하고 있다. 이 잔치에서 견주의 아들이었던 15세의 능안이 와 앞에서 ‘가야지무’를 추었다. 이것을 본 왕이 춤을 추는 능안을 보며 그의 단아한 여 용모가 단아함에 감탄하였고 왕이 하사하는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후하게 폐백을 내려 칭찬했다고 한다. 더 이상 이 춤에 대한 내용과 의상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씩씩한 남성적인 기상이 담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진평왕 시대에는 ‘혜성가무’라는 춤이 생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의 화랑이었던 거열랑, 실거랑, 현 동랑 등의 세 사람이 지금의 금강산인 풍악산에 놀이를 가려고 할 때에 한 혜성이 나타나서 심대성을 침범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불길하게 생각하여 놀이하러 가는 것을 멈추고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이 느끼기로는 이것이 위군이 신라에 침입해오는 징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 융천사가 혜성가를 지어 노래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혜성을 즉 멸하게 되었고 일본의 병사를 환국시켰다. 이때 이것을 보았던 왕이 말하기를 ‘화가 변하여 복이 되었다.’고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화랑도들에게 풍악놀이를 시켰다고 하는데 이를 ‘혜성가무’라고 한다. 이것은 노래만을 부르는 향가로만 그치지 않고 무용을 포함한 무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춤의 자세한 형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유리왕 시대에는 ‘도솔가무’라는 무악의 형태를 알 수가 있다. 유리왕 19년이던 4월 1일에 하늘의 해 두 개가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서 일관은 인록이 있는 스님을 청하여 꽃을 뿌려서 정성을 들이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친히 왕이 나가서 스님을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에게 기도문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월명사는 국선의 무리에 속하였기에 향가밖에는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도솔가’라는 향가를 지어서 바쳤더니 조금 있다가 해의 이상한 현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도솔가는 가무악의 형식을 갖춘 것이었으며 춤이 곁들여졌기에 ‘도솔가무’라고 한다. 헌강왕 시기에는 ‘옥도령’이라는 춤의 기록이 전해진다. 금강령에 왕이 거동하였을 때에 북악에서는 산신이 나타나 신령한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고 명명하였다. 또 헌강왕 시대에 전하는 ‘상염무’라는 춤이 있다.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 신이 왕의 어전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포석정은 신라의 호국 신을 제사 지내던 곳이며 현재도 지내는 곳이다. 이 춤이 왕의 좌우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홀로 보였다. 이 춤을 본 왕 자신도 춤을 추어 그 형상을 보였는데 산신의 이름을 '상심'이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고도 한다. 또한 말하기를 ‘신이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서 공인에게 모각케 하여 후세에 보이게 하였다.’하므로 이를 ‘상심’ 또는 ‘상염무’라고 하였으며 이는 그 형상을 따라서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선유락에 대하여 살펴보자. 선유락에 대하여는 신라시대 때 추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형태와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말 순조 시대에 기록되어 있는 ‘진찬의 궤’ 에는 선유락이 궁중의 향악 정재로 추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그 유래를 신라시대부터 찾아보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선유락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유락은 여러 명의 기생들이 양쪽으로 나누어 서서 곱게 단장한 채선을 준비해 놓고 있다. 기생들은 배가 떠나가는 모양을 하면서 뱃줄을 끌고 ‘이선가’와 ‘어부가’를 노래하며 춤을 추는 형태를 한다. 이때 어린 기녀들이 배에 올라타고 닻과 돛을 각각 잡으면 2명이 배 앞에 늘어서서 호령 집사 한다. 여기 10명은 뱃전을 좌우로 나누어 서서 뱃줄을 잡고 춤을 추며 집사기의 행선 명령에 따라 세 차례 징소리가 요란히 울리면서 배가 떠난다. 이때 ‘어부사’를 병창하며 배를 끌기 시작하고 이어서 배를 빙빙 끌고 돌리면서 뱃놀이하는 흉내를 내며 춤을 춘다. 이것이 끝날 때에도 집사기의 명령을 따라서 세 번의 징 소리를 울린다. 이때 부르던 배따라기 노래는 수로 만 리의 위험한 길을 떠나는 이들을 전송할 때도 불렀던 노래이며 이 춤도 함께 추었다고 한다. 배따라기는 ‘배 타기’라는 말이며 그 노래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닻 뜨자 배 떠나니 이제 가면 언제 오리, 만경창파에 가는 듯이 돌아오소.’ 선유락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이상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민속무에 있어서의 선유락도 역시 뱃놀이 형태의 가무를 보이며 궁중의 정재처럼 그 모습이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민속적인 소박함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신라시대의 무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신라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춤 중에서도 처용무, 무애무, 검무, 사선무, 선유락과 같이 이 다섯 종류는 신라의 향악정재로 전환되었으며 고려사 악지와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신라 28대 진덕왕 5년에는 국가 기관으로 예부에 음성서를 설치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궁중의 여러 악무들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전문적인 예술인을 양성하게 되는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이 시대부터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이 구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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