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신라의 오기, 사선 무와 무애 무

by 소리향 2021. 2. 23.
반응형

신라의 오기와 사선 무와 무애 무에 대하여

신라의 오기라고 하는 것은 삼국사기에 전해오는 것으로 신라 말기 헌강왕 때 최치원의 시의 내용에 전해지는 것이다. 오기라는 것은 향악 잡영 오수의 내용인 다섯 가지 종류의 놀이를 일컫는다. 이 다섯 가지의 놀이는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를 말한다. 신라의 오기는 신라 시대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서역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반인들에게 연희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대중들에게 친숙한 놀이이므로 향토적인 색채가 많이 가미되어 진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오기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겠다.

먼저 금환에 대한 기록은 육당 최남선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금환은 금색의 칠을 한 여러 개의 공을 공중으로 높이 던졌다가 받으면서 노는 놀이의 일종이다. 금환은 오기 중에서도 맨 처음 부분에 연희되었으며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일반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시행되던 일종의 관객을 모으기 위한 행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놀이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행되었다. ‘월전은 중앙아시아 지방으로부터 전해 들어온 가면무의 일종이다. ‘월전은 술에 취하여 춤추는 춤을 말한다. 다음으로 대면은 금색의 커다란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 느리고 의젓하며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샤머니즘적인 춤으로 추측하고 있다. ‘속독은 남색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뛰면서 추는 이국적인 춤이다. 속독은 4명에서 6명이 추었던 군무이며 오늘날에 전해 오는 봉산탈춤이나 오광대의 말뚝이춤과 같은 농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산예는 서역계통의 사자춤의 일종으로 사자처럼 옷을 입고 추는 가면무이다. 산예에 대하여는 송석하 씨가 나의 주관으로는 신라의 산예는 수당을 경유해서 온 서역계의 가면 사자의 무용이며 그 무용에는 다분히 벽사 사상이 포함되었으리라 하겠다.’고 하였고 신라의 산예의 변천상이 북청의 사자라는 것, 일본의 사자무의 수입계통이 한국을 경유했다는 두가지의 특징을 그의 신라에 대한 산예와 북청 사자의 결론으로 제시하였다.

이처럼 오기에 대하여 살펴보았듯 금환을 제외한 네 가지의 것은 모두가 가면무의 형태를 띠고 행하여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면무는 고려조의 산대 잡희나 조선조의 산대놀이와 같은 것을 행할 때에도 연희되었음은 물론이며 조선조까지 와서는 이러한 가면무를 포함한 잡희를 나례도감에서 관장하였다. 인조 12년에는 이러한 잡희가 공의로서 폐지되었다. 때문에 당시의 나례도감에 예속되었던 연희자들은 생활을 위하여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산대 놀음으로써 그들의 생활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오늘날에 행해지고 있는 중부형의 산대놀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의 오기는 신라의 가무백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가면희극인 고려의 산대잡극이나 조선의 나례 잡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예능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오기의 호칭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미흡한 상태이다. 그리고 이 오기에 대해서는 이것이 신라시대의 우리 고유의 형태가 아니고 외국에서부터 유입된 것이며 특히 서역의 영향을 입은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압도적이다. 산예인 사자무에 대해서 최치원이 향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 이에 대하여 최상수 씨는 그의 <해서 가면극>의 연구에서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이 놀음을 보고 읊은 최치원이 어찌하여 향악이라 하였을까? 그가 이것을 보고 향악이라 한 것은 이 악무가 최치원 시대에 그 이전부터 신라에 수입되어 이미 내용으로나 형태가 향토화 되어 일반으로 향악 시 되고 있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자무에 대하여는 그 기원 지를 서역으로 보고 있으며 그것이 한대에 들어와서 당대에는 중국 각처에 성행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에 여러 가지의 기악과 함께 당으로부터 들어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주로 정초에 벽사에 이용되어 민간에 널리 전파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학설에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다음은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사선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사선무는 신라의 화랑이었던 영랑 ,술랑, 안상, 남석이란 네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함께 수려한 자연을 떠돌며 향유를 즐기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선이라고 하였다. 금강산에는 무선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네 사람이 취무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때 그들이 추었던 춤을 속전 사선 취무라고도 한다. 이 춤이 순조시대에 이르러서 궁중의 향악 무로 연희되었으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위한 내용의 노래 가사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 춤을 살펴보면 먼저 2명이 각각 연화 한 가지를 들고 앞에서 일대를 짓고 있으며 4명은 그 뒤에서 2대를 지어 모두 북쪽을 향하여 춤을 춘다.

신라 시대에 전해지는 춤으로 또한 무애무를 들 수가 있다. 이 무애 무에 대해서는 통일 신라 이전의 무용으로 당시의 원효대사가 실계하여 설총을 낳은 후에 속복을 입고 광대가 가지고 다녔다는 표주박을 본떠서 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불교를 포교하는 목적으로 노래와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비롯한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무애무는 무애 즉 표주박을 춤추는 형태의 춤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