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무용에 대하여 살펴보는 중에 대부분의 무용들이 오늘날에 복원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조선 시대의 무용을 면밀히 살펴본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무용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가능한 한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면 이번 장에서는 보태평, 정대업, 선유락, 광수무, 봉래의와 향발무, 학무를 좀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료가 악학궤범과 정재 무도 홀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 이 자료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계임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오늘날에 복원된 춤들도 있지만 이보다는 기록에 의한 것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먼저 ‘보태평’에 대하여 알아보자. 보태평은 세종 29년에 세종대왕이 ‘정대업’과 함께 친히 창작한 것이다. 이는 주로 회례악으로 사용하던 악무라고 할 수 있다. 세조실록 권 32에 의하면 보태평은 세종 때는 11곡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조 9년에 최항으로 하여 가사를 줄이게 하였다고 한다. 세조실록 권 48에는 악조도 줄이는 동시에 임종 평조를 황종 평조로 전조 하였다. 또한 세조 10년 정월부터는 이를 제례악으로 채택하였다. 보태평은 왼손에는 약악을 들고 오른손에는 적을 들고 춤을 추는 무무라고 할 수 있으며 제례악에 맞추어 36명이 열을 지어 춤을 추는 6 일무의 형태이다. 이와 더불어 ‘정대업’도 보태평과 같이 무무이다. 이는 육일무에 속하는 춤으로써 종묘 제향의 아헌과 종헌의 예에 사용된다. 정대업은 보태평과 함께 세종 29년에 세종대왕의 조종의 무공을 찬미하기 위하여 지은 악무이다. 이것도 처음에는 모두 15곡이었으나 세조 9년에 최항에게 명하여 역시 11곡으로 줄였다. 이는 회례 악무에 사용하기 위하여 창작하였다. 그리하여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 악무로써 채택하게 되었다. ‘선유락’은 향악 정재로써 이 춤이 발생한 연대와 제작자에 대하여는 전해지는 바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 시대부터 이 춤이 유래하였고 순조 기축 ‘진찬의궤’ 이후 고종 신축 ‘진연의궤’에 이르기까지 궁중의 큰 행사나 잔치가 열릴 때마다 행하여졌다. 이 춤의 기록에는 징이나 자바라, 나발, 북, 등으로 구성되는 내 취수의 명단이 있는데 이는 선유락을 상연하기 위한 대령 악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수무’는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당악무로서 두 사람이 향악 교주, 천록 영창에 맞추어 춤을 춘다. 광수무는 숙종 기해 ‘진연의궤’에 의해 알 수 있다. 이는 기해년 9월 28일 경현당에서 진연을 베풀 때 제1작에서 제7작을 올리는 동안 음악과 춤이 연출되었는데 춤은 제3작부터 연출된 것을 알 수 있다. 순조 기축 ‘진찬의궤’에 의하면 광수무는 원무 2명에 협무20명으로 이루어졌음을 살펴볼 수 있다. ‘봉래의’라는 것은 태조의 창업과 공덕을 기리면서 지은 춤이다. 이 춤은 한글로 용비어천가가 지어진 후에 창작된 정재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것은 ‘조종 적루의 심원함과 면조의 가난함을 표현한 것’으로 아름다운 무작이라고 하기보다는 용비어천가의 악장을 사용하여 주로 부르고 있음이 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연주하는 음악으로는 당악과 향악을 섞어서 연주하지만 치화평무와 취풍형무로 변할 때에는 향악만으로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남악과 여악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다른 향악 정재가 엎드려서 면복으로 시작하고 끝도 그렇게 하지만 봉래의의 경우는 봉죽간자 두 명과 무기 8명이 나와서 정위치에 서면은 곧 춤이 시작된다. 또 주악과 박의 소리에 맞추어서 진행되며 절차에 따라서 구호와 용비어천가를 부른다. 춤은 족도, 대무, 배무, 회무를 하다가 치화평무로 바꾼다. 그리고 죽간자가 처음 위치에 오르면 춤이 끝나는 것으로 진행되며 이런 점이 다른 향악 정재와는 다른 점이다. ‘향발무’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져서 내려오는 춤으로 나이 어린 여기 8명으로 이루어져서 춤을 추거나 2,4,6,10,12명으로도 이루어지는 춤이다. 부딪히면 소리가 나는 ‘향발’이라는 작은 타악기를 두 손의 모지와 장지 손가락에 붙들어 매고 장단에 맞추어서 두세 번씩 바꾸어서 치면서 춤을 춘다. 대무와 배무 등으로 바꾸어가며 소리를 내며 추는 춤이다. 순조의 ‘진작의궤’와 ‘진찬의궤’의 그림을 통하여 그 장면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학무’는 아름다운 학의 형상을 하고 춤을 추는 것으로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춤이다. 이는 악학궤범에 그 무보가 전하고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보허자령의 주악에 맞추어 기녀들이 노래를 부른 다음에 청학과 백학이 지당 앞에 동서로 나누어 서서 북쪽을 향하여 춤을 추는 것이다. 연주되는 음악과 박자에 따라 학이 몸을 흔들어서 북을 친다. 또한 족도 하여 걸어 나가서 학의 온갖 움직임을 흉내 내기도 하고 다시 연통을 주둥이로 쪼다가 연꽃 안에서 두 동녀가 머리를 들고 나오면 두 학이 놀라서 뛰어나가는 것으로 춤이 마무리된다. 조선 후기에는 각정재 무도 홀기에 청학과 황학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으나 그 무보는 동일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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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보태평, 정대업, 선유락, 광수무, 봉래의, 향발무, 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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