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그동안 화려하게 자리 잡았던 불교문화들이 차츰 쇠퇴하게 되었다. 모든 사상이나 문화 등은 유교의 기본 원리에 의해서 전개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문화와 예술, 풍속 등도 유교에 기초한 사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정치는 항상 예와 악에 기초를 두었으며 조선 초기부터 제도를 정비함에 힘썼기에 중앙에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아악서와 전악서를 두게 되었으며 악정을 바로잡기에도 매우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예악의 부흥은 단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4대 세종의 시대부터 힘쓰게 되었으며 제7대의 세조 때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완수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금속활자의 주조, 그리고 측우기의 발명, 서적의 간행과 건축, 회화, 공예 등에서의 정비로 인하여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 다방면으로 눈부신 성장과 발달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음악도 재정비하고 재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음악은 아악, 당악, 향악으로 나뉘었고 이와 함께 당시의 악기와 악곡 등도 재정리하게 되었으며 정간보와 같은 우리나라 고유의 악보를 만들어서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문화예술로 전해오는 한국 전통 예술의 기초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음악이 창제되고 정리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에 맞추어서 음악에 어울리는 우아하고도 화려한 궁중정재무가 안무되었다. 그 후 성종 시대에 이루어진 문화 예술 재정리 사업으로도 당시의 모든 무용이 자세하게 정리되었다. 이는 악학궤범을 통하여 그 예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의 역사는 조선 후기 영조로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부흥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조선의 문화예술 재정비 사업은 참으로 역사적이고도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음악과 무용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개국의 위업을 기리고 국가와 왕실을 위한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수단으로써 음악과 예술이 폭넓게 도입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리된 음악과 무용은 역사를 통해 아름답게 갈고닦아져서 당시의 예인들을 통하여도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세계적인 예술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조선시대의 궁중무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무용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서 그 명맥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발생했거나 창작된 궁중정재는 53가지나 달할 정도로 조선의 무용예술은 부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많은 종류가 조선 초기에 창작된 춤으로 볼 수 있다. 초기에 창제된 춤을 살펴보면 몽금척, 수보록, 근천정, 수명명, 하황은, 하성명, 성택, 곡파와 같은 춤들이다. 이들은 악학궤범을 통해 당악정재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용의 특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왕이나 왕가의 융성을 축원하고 있으며 왕업의 번영을 축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춤의 내용이나 부르는 노래의 가사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창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조선 전기의 8종류의 춤을 구성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악 정재를 출 때 들고 사용하던 무용 도구에는 죽간자, 인인장, 황개, 정절, 용선, 작선, 미선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죽간자’는 길이가 2~3m 되는 붉은 칠을 한 나무자루 위에 가는 대 100개를 꽂고 붉은 실로 엮은 다음에 대의 끝 3cm가량에 금박을 한 수정 구슬을 달아서 장식을 한 의물이다. ‘인인장’의 자루는 대나무로 만들고 붉은 칠을 하며 정자는 나무로 하고 금을 칠한다. ‘황개’의 자루는 나무로 만들고 붉은 칠을 하며 꼭대기에는 곡철을 만들어서 끝에다가 개를 달았다. 정자는 은으로 만들고 황색 비단으로 3층을 만들어 금봉과 금화문을 찍고 안에는 색실로 매듭을 4개 드리운다. ‘정절’의 자루는 대나무로 만들고 붉은 칠을 하며 목개는 붉은색, 녹색, 흑색의 비단 세 겹으로 붙이고 총길이는 8척 3촌이다. ‘용선’은 대나무로 만들고 부채 둘레는 쇠로 만들며 붉은 비단을 붙이고 녹색 실로 배고 금봉을 그린다. ‘작선’의 자루는 대나무로 하고 두터운 종이를 배접 하여 참새 날같이 하고 양면에 5색을 칠하고 가에는 금을 붙인다. 총길이는 7척 7촌이고 넓이는 1척 6촌, 부채의 길이는 1척 9촌 5푼이다. ‘미선’의 자루도 대나무로 하고 종이를 배접 해서 만들며 생초를 발라 양면에 공작 꼬리를 그린다. 부채의 길이는 2척 1촌이며 넓이는 1척 6촌이고 총길이는 7척 9촌이다. 이렇게 당악정재에 사용하던 무구를 살펴보았다. 이 중에는 의물이 들어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나타난 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용 향악정재로 문덕곡, 봉래의 등이 있으며 정재홀기와 진연의궤, 진찬의궤 등에 나타난 춤으로는 초무, 첨수무, 공막무, 춘앵전, 경풍도, 첩승무, 최화무, 항장무, 사자무, 연백복지무 등이 있다. 그밖에도 조선시대에 연희되던 춤으로는 망선문, 영지무, 춘광호, 연화무, 춘대옥촉, 보상무, 만수무, 헌천화, 박접무, 침향춘, 향령무, 젯창, 무산향, 고구려무, 장생보연지무, 가인전목단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춤들은 조선 후기의 외란으로 인하여 한동안 전승이 되지 않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야 재연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순조 시대의 효명 세자에 의해서 전승될 수 있었다. 그 춤으로는 가인전목단, 경풍도, 고구려무, 만수무, 망선문, 무산향, 박접무, 보상무, 사선무, 연백복지무, 연화무, 영지무, 장생보연지무, 제수창, 첩승무, 최화무, 춘광호, 춘대옥촉, 춘앵전, 침향춘, 향령무, 헌천화 등이다. 이때에 창제된 정재를 보면 춤의 외형적인 요소보다 내적인 구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민족적인 정서를 되살린 우리의 고유한 예술성을 강조한 춤과 예술적인 춤을 창작하려고 애썼던 것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져서 연희용으로 추다가 의식무용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궁중에서 쓰이던 의식무가 있다. 이는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이며 이는 일무의 형태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밖에도 의식무용으로 풍운뇌우, 사직, 선농, 선잠, 우사, 문선왕의 석전에 사용되던 아악의 일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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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용의 배경 및 궁중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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